이탈리아 통일 후, 군대가 해체되어 많은 사람들이 실직 상태가 되어 실업난 가중 등으로 인해 국내가 불안정하였다. 그들은 크로코로 대표되는 비적이 되어 왕국에 반기를 들었다. 비적은 1861년의 크로코에 의한 샤르데나 침공에서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주로 지주로부터 재산을 약탈하는 활동을 하여 민중으로부터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1862년 걸리버 루디에 의한 아스프로몬테의 변란을 기로로 한 계엄령 선포나, 이어서 1863년 제정된 피카 법에 의해 비적에 대한 압력이 높아졌다. 민중까지 피해를 입히게 된 비적은 점차 지지를 잃어가다가 1864년에 내통자가 정보를 실토하는 바람에, 단번에 진압되었다.
교황 보장법을 제정하여, 교황청의 지위를 보장하려고 하였지만 교황청측이 거부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는 국정에 참가하지 말 것을 호소하여 로마 교황청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덧붙여 이 대립은 무솔리니 정권 시에 라테란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톨릭 신자의 비중이 높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교황청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국교가 없었다. 가톨릭은 1929년이 되어서야 국교가 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영토 문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대립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삼국 동맹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11년 프랑스-이탈리아 협상을 이유로 중립 선언을 하였다. 1915년에 런던 비밀 조약을 맺어, 달마티아와 남티롤을 이탈리아에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전승국의 지위를 손에 넣었다. 대전 기간 동안 이탈리아 전역, 중동 전역 (제1차 세계 대전)에 군 병력이 파견되었고 이 중에서 65만 명이 전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었으면서도, 이탈리아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영토 확대 요구의 대부분을 거부당했다.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강화 회의의 패전국’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의 병합은 완수했지만, 전후의 민족자결주의의 기세가 높아짐에 따라 달마티아를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정부의 저자세에 대한 불만이 확대되었다. (달마티아는 유고슬라비아가 인수)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의 경제에 너무 무거운 부담이 되고 있었다. 전후 생긴 인플레이션은 빈민층의 불만을 일으켜, 북부의 토리노와 밀라노같은 공업 도시에선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등이 일어났다. 남부에서도 농사꾼, 소작농 등의 폭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물론 이러한 계급간의 갈등은 세계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인 러시아 혁명의 영향이기도 했기 때문에, 유산 계급에게는 무산계급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불안한 정세하에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의 전신인 파시스트 전사를 조직했다. 그는 사회 정책의 충실한 이행을 주장으로 내걸면서 내셔널리즘을 옹호해, 기존 정당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밀라노에서 선거에 출마하여 완패당해, 무솔리니가 일시적으로 체포되는 등 그 활동은 당초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도시와 농촌의 쌍방에서 자본가와 지주, 노동자와 소작인 간의 대립 구도가 지속되었으며, 빈민층을 옹호하는 사회당 정부에 불만을 품은 지주층은 파시스트 세력과 결탁하여 농촌부의 사회당과 노동 조합의 거점 등을 연달아 습격했다. 이것을 징벌원정이라고도 부른다.
당초에는, 농촌 지역의 각지에서 라스로 불리는 지역 지도자가 권력을 잡고 있었지만, 무솔리니가 서서히 지방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파시스트 전사는 보수주의권의 지지를 얻어내어, 1921년까지는 당원을 10만 명 정도로까지 확대되어, 동년에 전국 파시스트당으로서 개편했다. 그리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 당원들과 검은 셔츠단를 이끌고 로마 진군이라 불리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 1922년 10월 이탈리아의 총리에 부임했다.
공식 명칭은 이탈리아 왕국이지만 무솔리니가 총리에 오른 1922년부터 총리에서 실각한 1943년까지 무솔리니와 국가 파시스트당의 통치 아래에 있던 이탈리아 왕국을 파시스트 이탈리아라고 별도로 부르기도 한다.
전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장남인 움베르토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움베르토 2세는 군주제 유지 여부를 국민들에게 묻기 위하여 투표를 실시하였으나 군주제 반대 표가 많이 나와서 결국 퇴위하였고 군주제도 폐지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국호가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